내 친구, 김봉두. 5 봉두가 첫 발령을 받은 곳은 서울이었다. 교장선생님께서 어머니회를 개최하는 공문을 발송하라고 했다. 봉두는 등사지에 문안을 쓰고 때와 곳을 명시하여 등사기로 밀어서 프린트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주어 가정에 보냈다. 어머니회가 개최되는 날 오후 아이들 돌아간 교실로 화려하게 치장을 한 어머니들이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봉두는 식순을 칠판에 붙이고 어머니회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책상 위에 봉투 하나씩을 놓고 그냥 돌아가는 것이었다. 교실을 나가는 어머니들을 다급하게 불러서 회의를 하려고 하였다. "어머님! 회의를 하고 가셔야지요." 어머니는 몸을 돌려 한 번 씩 웃고 그냥 나가시는 것이었다. 그 웃음은 '다 알면서 괜히 지랄이야' 그런 메시지..
내 친구, 김봉두. 4 지금은 소규모 농촌 학교지만 지난 시절 도호부였던 실학면의 실학초등학교에 부임하게 된 봉두는 감회가 남달랐다. 곳곳에 지난 시절 화려했던 전통 문화가 숨쉬는 곳이며, 서각 시인의 고향이기도 하였다. 우선 권련을 사 들고 그곳에 사시는 시인의 춘부장을 뵈었다. 정중히 큰절을 올리고 학교에 봉직하게 됨을 고했다. 대개 봉두의 예법이 이러하였다. 봉두의 눈에 띄는 것이 학교 주위에 있는 잡초 무성한 밭이었다. 지적도를 보니 학교부지였다. 수십 년 전 이 고장 출신 독지가 남징용 씨가 학교 실습지로 기증한 땅이었다. 그 독지가는 왜정 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가난을 극복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차별을 극복하고 일본에서 큰 재산을 모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30..
내 친구, 김봉두. 3 봉두가 이른바 높은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행위를 아직까지 되풀이하는 일에 대해 주위 사람들이 보내는 눈길은 그리 고운 것이 못된다. 나는 그것이 안타까워서 가끔 이제 그만 두기를 권하기도 한다. "이제 그만하지......" "그래 말이야, 신부님도 용서하라고 하시는데......" 그도 용서하는 삶을 살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게 잘 되지 않는 눈치다. 그는 유신 정권 때 국가원수 모독 죄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이력이 있으며, 5공 때에도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했을 따름이지만 그를 향한 권력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하는 무식함이었다.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지난 군사 정권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고통을 상상할 수가 있을 것이다. ..
- Total
- Today
- Yesterday
- 학교
- idle
- windows mobile
- 독일 이민
- demo application
- 교사
- 교육
- mixnstand
- 독일이민
- 호핑
- 김봉두
- 독일
- Blue Card
- ios
- 세부
- 독일 구직
- 필리핀
- It
- Programing
- 커피
- 호핑투어
- IFA 2011
- mobile
- 사무실
- UbiVelox
- 블루카드
- widget
- 독일 IT
- CocoaPods
- IFA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