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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김봉두. 7



국산 기계 50 이상 쓰면 고장나게 마련이지.

건강에 대해 이야기할 우리가 흔히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다. 하지만 봉두는 아직 기계가 말짱하다.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가?"

 

봉두는 태백산 아래 산수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지금은 벽지 점수가 있기 때문에 다투어

가려는 곳이지만 시대에는 두메산골이라 하여 누구나

꺼리는 곳이었다.

봉두는 태백산 아래 마을에서 제법 여러 해를 근무했다.

태백산은 마을마다 소풍 장소가 만한 비경을 품고 있다.

그래서 어떤 미학자는 이곳을 최후까지 숨겨두고 싶은

곳이라 했다.

말하자면 이곳에서 좋은 공기와 좋은 물을 마음껏 마시며

거기에 따뜻한 인정까지 보너스로 받은 것이

그의 건강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산수초등학교 학구에는 한센씨병이라 불리는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향락촌이 있다.

학생 가운데는 당연히 미감아가 있게 마련이다.

학기초에 학급을 편성할 봉두는 미감아가 있는 학급을

희망했다. 봉두의 사람됨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것이 박이익 선생의 미움을 사게 계기가 되었다.

박이익 선생은 지난 미감아 학급을 맡았다.

그런데 봉두 때문에 올해는 자리를 잃게 것이었다.

그래서 박이익은 사사건건 봉두에게 미움의 눈빛을

보내는 것이었다.

 

봉두가 박이익의 심정을 이해하게 것은 미감아 학급을

맡으면 승진 점수가 있고 수당도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였다.

이해한다기보다 실은 속으로 박이익을 씨방새에 임명했다.

그리고 자신이 설정한, 사람의 범주에서 그를 추방했다.

 

미감아인 미강이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래서 봉두는 향락촌으로 가정 방문을 갔다.

아무리 담이 천하의 김봉두도 향락촌에 들어가는 길은

으스스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한센씨병에 대한 오해가 만연해 있었다.

보리밭에서 아기를 잡아먹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사실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해와 날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 보리밭에 달이 뜨면 아기 하나 먹고 / 꽃처럼 붉은 울음 밤새 울었다. - 말당의 문둥이

 

미강이의 집에 들어서자 미강이 아버지 문선량 씨가 뜨악한

표정으로 봉두를 맞이했다.

봉두는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선량 씨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양손 모두 손목만 있고 손이 없었다.

미강이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했다.

이윽고 조촐한 술상이 나왔다.

 

"선생님, 한잔 드십시오."

 

손목과 손목 사이에 술잔을 끼워서 봉두 앞으로 내밀었다.

봉두는 마침 십리 길을 걸어온 터라 목이 컬컬했다.

잔을 받아 단숨에 쭈욱 마시고 선량 씨에게 한잔 가득 부어

권한 다음 짠지를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이제 선량 표정이 밝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술잔이 차례 오고가자 선량 씨는 마음의 문을 열었다.

 

"사실 가정 방문 오시기는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작년에 박이익 선생님이 미강이 담임이셨잖아요."

 

". 2 미강이 담임이셨지요."

 

나중에 일이었지만 음식을 권하는 것은 마을 사람이

외부인에게 행하는 통과 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자기들이 주는 음식을 스스럼없이 먹을 있는 사람에게만

이들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봉두는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고 돌아오는 길엔

귀한 초란(처음으로 낳은 ) 선물로 받아 왔다.

 

후로 봉두는 시간이 때면 향락촌을 방문하였다.

우선 마을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이 좋았다.

나랏님도 이렇게까지 마음으로 환영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온갖 귀한 먹을거리를 마음껏 먹을 있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사람들의 마을이기 때문에

건강에 좋다는 온갖 먹을거리가 풍부한 곳이 그곳이다.

아마 봉두가 지금껏 나보다 기운이 것은

때문이 아닌가 한다.

 

선량 씨는 남쪽 바닷가 마을 사람이었다.

선량 씨에게 한센씨병이 발병한 것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였다.

병이 나자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이곳 저곳 정처 없이

떠돌다 향락촌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 한다.

풍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고향에 찾아갔지만 차마 집에 수가 없어 뒷산에 올라가 고향집 불빛을 보면서, 밤새도록 소주 마시며 울다 왔다 한다.

말당 어법으로 꽃처럼 붉은 울음이었다 한다.

 

봉두의 황소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슬픈 이야기를 안주 삼아 선량 씨와 함께 술을 마시다 봉두는 오줌이 마려웠다. 오줌을 누기 위해 신을 신으려는 순간 선량 씨가 달려와서 봉두의 신을 찾아 신겨주었다. 술이 과하지도 않은데 그러시냐고 물었다.

여기서 봉두는 귀한 교훈을 얻게 된다.

 

"신을 바로 신어라."

 

선량 씨에 의하면 한센씨 병균은 햇빛에 노출되면 금방 죽기 때문에 한센씨병 환자와 아무리 교류를 해도 감염의 우려가

없지만 신만은 바꾸어 신으면 된다는 것이다.

신은 습하고 어둡기 때문에 감염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향락촌에서는 항시 신을 바로 신으라는 것이다.

신을 바로 신는 일이 어디 향락촌에서만이랴?

이것이 봉두의 좌우명이 되어 봉두는 후로 남의 신을

번도 신은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봉두의 가정은 지금도 건강하고 평화롭다.

 

이제 여기쯤에서는 봉두가 박이익 선생에게 욕을 보여야

차례다.

이렇게 끝나면 미감아 학급 담임으로 점수와 수당만 챙기고

가정 방문 가지 않은 박이익에 대한 배려가 너무 소홀하지 않겠는가?

 

인근 산으로 가을 소풍을 갔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이익 선생님이 아이들 전체에게 훈시를

하기 위해서 앞에 놓인 상석 위에 올라섰다.

아마 상석을 교단으로 착각하신 모양이다.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남의 조상의 묘소에 놓인 상석 위에 신을 신고 올라가다니 이런 호로 자슥이 있나 했다.

이때를 놓칠 봉두가 아니었다.

 

"얘들아, 모두 절해라. 저기 제물(祭物) 있다."

 

아직 제물의 낱말 뜻을 제대로 배우기 전인 아이들은

봉두의 구령에 따라 절을 하고,

이익이는 얼굴이 조율이시(棗栗梨枾) 감홍시가 되어서

상석을 내려왔다.

이익이는 사범학교를 보결로 들어간 분으로 나중에 교장이

되었다는 풍문이 있기도 하지만 이에 서각공은 말한다.

이익이의 허물이 그리 크겠는가?

손해를 멀리 것과 봉두를 만난 것이 자못 안타까울진져.

 

 

 

                                                      -, 서각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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