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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두의 고향 마을은 태백산 발치의 강원남도 산골이다. 

태백산맥 줄기에 입지해서인지 이 인근에는 파르티잔(빨치산)이 유난히 많은 곳이었다. 

봉두와 가까워지면서 나는 봉두로부터 그의 고향 마을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한 파르티잔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머리 속에 영인된 파르티잔의 이미지는 냉정하고 무자비한 인간상이었다. 그것은 아마 나의 성장 시기가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로 국한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봉두가 나에게 들려준 파르티잔 이사열의 이야기는 내 머리 속에 심어진 파르티잔의 이미지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봉두의 친구 삼식의 부친이기도 한 이사열은 이 마을에서 

인물 좋고 머리 좋기로 이름난 젊은이였다. 

그가 골목을 지날 때는 동네 처녀들이 울타리 뒤에서 혹은 

울타리 너머에서 몰래 바라보고 가슴을 설레곤 했다고 한다. 독학으로 신학문과 사회 과학 공부를 한 이사열은 해방 공간에서 열렬한 사회주의자로 활동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내려오자 이사열은 군당위원장이 되었다. 

인민군 점령 당시의 사회상은 어느 지역이나 그 양상이 다르지 않았다. 


읍내에 주둔한 인민군은 소와 양식을 징발하고 차용증을 써 주었다. 지주 계급에 억눌려 살던 젊은이들은 빨간 완장을 차고 기세 등등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곧 이어 군인, 경찰, 공무원의 집에는 재산 몰수를 의미하는 빨간딱지가 붙고, 악질 반동분자로 지목된 사람들에 대한 인민 재판이 열리려고 하였다. 북에서 내려온 당 지도위원은 이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하고 있었다. 


피의 제전을 벌이려는 당 지도위원에게 이사열은 제동을 걸었다. 


"내 구역은 내가 책임진다. 한 사람도 다치지 않게 하라!" 


물론 지도부로부터 거센 저항이 있었지만 이사열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 마을에는 인민 제판도 없었고 한 사람의 인명 피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전쟁도 인천 상륙작전으로 역전되었다. 

다시 국군이 마을에 주둔하고 인민군은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사열은 아내와 4남매를 남겨둔 채 인민군과 함께 북으로 갔다. 이 당시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마을을 점령하게된 우익 세력들에 의해 보복이 자행되었다. 


어떤 이는 감나무에 묶여 처형당하고 어떤 이는 뭇매를 맞아 폐인이 되기도 했다. 

마을에 남은 이사열의 가족도 피를 말리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이 없는 그의 집에는 늘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쌀, 땔감, 된장 등의 생필품이 마루에 쌓이곤 했다. 봉두 친구, 삼식이 가족은 어려운 전쟁 시기에도 굶주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사열 씨가 북에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진달래꽃이 몇 번 피고 져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마을 사람들에게, 이념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감동만을 남겨 놓은 채, 

태백산맥을 따라 사라지고 말았다 한다. 

휴머니스트이자 파르티잔인 이사열, 그는 아마 북녘 하늘 어딘가에서 민족의 비상을 위해 왼쪽 날개를 부지런히 움직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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