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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김봉두. 8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는 다양하고 정답다.
한 잔 어때?
날도 촉촉한데 한 잔 할까?
오랜만인데 얼굴 좀 보여 줘.
전화를 받네. 입적하신 줄 알았지.
오랜만에 젖어볼까?
시월에 마지막 밤인데 뭐하고 있어?
광대 이 아무개의 노래 말 때문인지 시월의 마지막 밤도
술 권하는 대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는가 보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 촌스럽고 아줌마스럽긴 해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데는 충분함이 있다.
특히 술이 있는 쪽으로 사람을 끄는 데는
제법 강한 설득력을 지닌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시월은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시간의 흐름이 눈에 보일 듯이 빠르게 진행되는 계절이다.
특히 인생의 반 이상을 산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언어와 결합되어
애잔함의 시너지 효과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 시월의 마지막 밤에 봉두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모님하고 같이 오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우리 사모님은 내 말이라면 일단 거부하는 분이니까
갈 리가 없다.
거기엔 이미 봉두 부부, 정성실 선생 부부가 자라잡고 있었다. 늘 그렇게 생각해 왔지만, 서울 출신인 봉두의 부인은 봉두와 천생연분이란 생각이다.
그에 의하면 부인이 자기보다 한술 더 뜬다는 것이다.
봉두의 힘은 아마 부인에게서 나온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른 아침 출근하기 전이었다.
지난 번 이비열 장학사 일행이 봉두의 집을 방문했다.
봉두가 고발한 건에 대해서 취하해 줄 것을 부탁하러 온 것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봉두의 아내는 부엌으로 가며
지나가는 말을 날리는 것이었다.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 말에 힘을 얻어 끝까지 당당할 수 있었다.
봉두가 사는 복지 아파트 옆에 큰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 공사장에서 땅을 깊게 파서 복지 아파트에 금이 생기고
건물 전체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건물주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도 보상을 하지도
않았다.
그 일로 복지 아파트 주민들이 술렁거렸지만 부도덕하기로
유명한 그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도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세요. 당신이 안 하면 누가 해요."
그래서 봉두는 대책위원장을 맡아 건물의 안전을 확보하고
집집마다 보상을 하게 했다.
봉두는 부인을 웃기는 여자라고 말했다.
부인은 빙그레 웃었다.
웃기는 여자라고 말할 때 봉두의 표정은 어조와는 달리
매우 행복해 보였다.
두루 아시는 바와 같이 명동성당은 우리 근대사의 민주화의
성지다.
많은 민주 투사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한다.
그런데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을 해산하도록 하기
위해 경찰을 투입해서 강제로 끌어낸 사건이 있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봉두는 이 일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우리나라 교회사에서도 카톨릭교의 성지로 인정되는
사랑과 평화의 장소에 경찰이 투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봉두는 서울까지 갈 수 없어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그는 누이가 독일에서 보내온 독일제 자전거에 깃발을 달았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그 자전거를 타고 온 시내를
다니는 것이었다.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웬 말이냐!
이 파격적인 시위는 대한민국 민주화 투쟁사에서
1인 시위의 원조로 기록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명동성당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공권력 투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관심이 없는
평화로운 시민들은 '별 우스운 자식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깃거릴 뿐 봉두의 소중한 뜻을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쳤나 봐.
저 사람이 선생 김봉두래.
괴짜는 괴짜야. 이런 수근거림만 이 마을에 떠돌았다.
그의 뜻은 소문 속에 묻혀버리고 그의 우스꽝스런 모습만이
널리 알려져서 이 도시에 삐에로처럼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어느 교사의 부인이 자신의 남편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아무런 명예도 될 수 없는 일로 하여 자전거에 구호를 걸고
시위를 하는 남편의 모습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봉두의 부인만이 봉두의 뜻을 귀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특히 봉두가 사는 소도시는
당나라당의 지지가 절대적인 곳이다.
당나라당 공천만 받으면 보좌관이 써준 연설문을 잘 읽지
못해도 구케우원이 될 수 있다.
지난 대선 때 놈현 후보의 지지가 20%도 못 되었던 지역이다. 더구나 가시적 체면을 중시하는 '선비의 고장'이기에,
시민 운동이나 권력에 대한 저항을 일부 몰지각한 짓이라
여기는 분위기가 안개처럼 퍼져 있는 곳이다.
그리하여 공무원이라면 면장, 선생이 라면 교장이 되어야
대접을 해주는 찬란한 계급 문화가 꽃피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봉두는 며칠 전 대학수능고사 때 복도 감독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복도 감독은 복도를 어슬렁거리다가 화장실에
가는 학생이 있으면 동행하여 수험생의 오줌 누는 소리와
손전화 소리를 구별하여 본부장에게 고자질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교육 용어다. 겨레의 스승이라는 자가 이따위 짓을 해야 하다니 참으로 쪽팔리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가 배치된 고사장에 총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
이얼분 장학사가 파견되었다.
이얼분은 평교사에서 작년에 장학사가 된 사람으로 원만한
사람이라고 소문이 나 있다.
1교시 종이 울리고 이 장학사가 복도로 나왔다.
그는 봉두에게 인사말을 건네고 옥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봉두도 무심결에 이얼분을 따라갔다.
이 얼분이 봉두를 돌아보았다.
"정위치 하십시오."
얼분의 권위 있는 멘트에 순간 황당했다.
봉두는 다시 복도로 내려왔다.
평교사와 장학사의 선을 분명하게 긋는 그의 말에 봉두는
쪽팔림을 금할 길이 없었다.
속에서는 이 씨바야 너도 정위치해라,
옥상에는 자살하려고 올라가니? 라는 말이 고개를 들었지만
사소한 일로 다툰다는 것은 자신을 더 쪽팔리게 할 것 같아
차가운 복도를 서성거리며 그의 권위에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그 지위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겠는가?
아내에게 숨기는 것이 없는 봉두였지만 이 말만은 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모든 쪽팔림을 참고 자신을 이해해 준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웃기는 여자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에도 늘 그러했듯이 봉두는 요즘도 정의구현 사제단이나,
참여연대에서 나온 전단지를 자전거에 싣고 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준다.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은 승진이나 돈과는 무관하다.
평교사로 퇴임하기로 작정했기에 승진을 바라지는 않지만
아내 외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는 이 지역에서
평교사로 늙어 가는 자신이 때로는
망망대해의 섬 같다는 생각이 스칠 때도 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공무원이면 면장이 되고 선생이면 교장이 되어야 알아주는
이 마을에서 평교사인 봉두가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누어준다. 그의 헐렁한 바지 가랑이 사이로 가을 바람이 부랄을 스쳤다.
춥다. 아니 무게 중심이 조금 흔들렸을 뿐이다.
겨울이 온다고 해도, 더 거센 바람이 분다고 해도
결코 쓰러지지 않을 사내 하나가 바람 부는 거리에 서 있다.
그의 어깨 위에 노란 낙엽 하나가 놓였다.
바람이 준 훈장처럼.
-글, 서각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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